진대제는 이런 사람
<차례>
01. 엄마, 내가 모래 팔아가 돈 억수로 마이 벌어주께
02. 경기고등학교 진학과 판자촌 생활
03. 10원짜리 우동국물
04. 맨땅에 헤딩하듯 공부한 반도체
05. 팔목 잡혀 한 결혼
06. 국비장학생으로 유학길에 오르다
07. 실리콘밸리의 품에 안기다
08. 호텔에서 만난 하느님
09. IBM을 떠나며
10. 일본을 삼켜 버리겠습니다
11. 삼성전자의 최연소 임원이 되다
12. 16M D램을 개발하던 날
13. 16M D램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다
14. 삼성에서의 초고속 승진
15. 카우보이모자를 쓴 사장
16. 소니를 잡아라
17. 10년 뒤 한국이 먹고살 거리를 만들어보시오
18. 정통부 때문에 못살겠다
19. 진 장관이 기획예산처 장관 하세요
20. 나에 대한 세 가지 오해
1. 엄마, 내가 모래 팔아가 돈 억수로 마이 벌어주께
나는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지리산 자락의 여배리에서 태어났다. 50여 년 전 나의 고향은 말 그대로 벽촌이었다. 어릴 적 기억에, 대청마루에서 내다보이는 것은 앞을 꽉 가로막아 숨이 막히는 높은 산뿐이었다. 당시 많은 가정이 그랬듯이 우리 일가에도 6·25사변의 생채기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먹고살기가 어려웠던 친척들은 부산으로 김해로 뿔뿔이 흩어져 떠나갔고, 우리 가족도 내가 네 살 때 고향을 등지고 대구로 이사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가족의 도시생활은 가난과 궁핍의 연속이었다.
호적을 보면 나는 1남 2녀 중 외아들이다. 그러나 내게는 핏줄이 같지만 다른 호적에 올라 있는 형님이 한 분 있다. 우리 집안의 종손이었던 큰집 아저씨가 자손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 여파가 우리집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큰집 아저씨의 일은 내 아버지의 인생에 큰 변화를 몰고왔다. 아들을 낳아 종갓집에 양자를 보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장가를 든 것이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한창 공부를 해야 할 나이에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사명을 안게 된 아버지는, 그런 연유로 양반행세나 하며 일하는 것은 아주 서툰 사람이 되었다. 대신 집안일은 열일곱 살에 시집온 어머니가 꾸려나가야 했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삯바느질을 하고 때때로 먼 산까지 가서 땔감을 구해오곤 했다. 어머니는 모두 10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대부분 전쟁통에 사망하고 결국 2남 2녀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가 마흔이 넘어서 낳은 늦둥이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농사일을 해야 했으므로 주로 큰누이가 나를 업어서 길렀다고 한다. 어머니 젖이 안 나오니 젖은 얻어먹어보지도 못했고, 달래주는 엄마도 없으니 하루종일 울면서 업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지금도 누이들은 내가 엄마 젖도 못 얻어먹고 그후로도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지를 못해 키가 자라지 못했다고 혀를 찬다. 막내라 그랬는지 나는 응석이 심해서 초등학교 2학년 때도 가끔 어머니 등에 업혀 학교에 가곤 했다. 하루는 어머니 등에 업혀 대구 방천길을 가는데, 인부들이 모래를 채취하기 위해 체질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내가 어머니께 물었다.
“엄마, 저 사람들 뭐 하고 있는기고?”
“모래 팔아서 돈 벌고 있다 아이가.”
그때 밤낮으로 고생하는 어머니 처지가 가여워서 그랬는지, “엄마, 내도 나중에 모래 팔아가 돈 억수로 마이 벌어주께”라고 약속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마음에 흔하디흔한 모래를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실제로 반도체의 주원료인 실리콘도 모래의 일종이니 그 약속은 지킨 셈이다. 아마도 반도체는 나의 운명이 아닌가 싶다.
2. 경기고등학교 진학과 판자촌 생활
내게 학창시절은 그리 즐거운 기억이 아니다. 가난 때문이었다. 기워 신은 양말이며 발가락이 나오는 구멍 뚫린 운동화, 점심시간마다 친구들 앞에 내놓고 싶지 않았던 보리밥도시락이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절 내게 큰 상처가 되었다. 때문에 내가 어른이 되면 이런 가난의 불편함을 절대로 자식들에게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지 열심히 하고 또 남한테 져서는 안 된다는 집념이 생겼고, 그게 유달리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나의 승부욕을 형성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난 탓에 누이 둘은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집을 떠나 서울 친척집에서 기식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내가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담임선생님께서 주선해주신 장학금 때문이었다. 아마도 공부는 곧잘 하는데 월사금 한번 제대로 못 내는 조그마한 학생이 불쌍해서 담임선생님이 몰래 신청해 주셨던 것 같다. 그때 그 장학금이 600원 정도였는데, 그 이후로는 등록금을 낸 기억이 없을 정도로 매년 장학금을 받았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우리집 형편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어머니가 이집 저집 다니며 빨래나 집안일을 해주고 돈을 받아왔지만 혼자서 모든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내가 도시락을 못 싸가는 날이 생기면서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 각자 먹고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내게 공부는 그 정도 했으면 됐으니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해 하루빨리 혼자 밥벌어 먹고살라고 하셨다.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려니 했고 그렇게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 옆집에 독신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큰누이뻘 되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내가 공부를 곧잘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공고에 가는 것을 한사코 말렸다. 자기가 도와주겠으니 큰누이가 있는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무런 대안도 없었던 부모님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나는 그 누나(나는 그분을 ‘대구누나’라고 부른다)가 시키는 대로, 전교 10등을 오락가락하던 내 성적에 맞춰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공고에 갈 뻔했던 ‘내 운명’은 서울로, 그것도 한국 최고의 명문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나는 운명으로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막상 그 어렵다는 경기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은 했지만 서울에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아는 집이라곤 큰누이 집이 유일했는데 그곳도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마침 대구에서도 오갈 데가 없어진 아버지께서 서울로 올라오셔서 함께 자취를 하며 살기로 했다.
아버지와 함께 허름한 사글세를 얻어 들어간 곳은 서부이촌동의 철거민촌이었다. 거기서 전차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해서 경복궁 근처에 있는 학교까지 등하교를 했다. 생활비는 어머니가 보내주셨지만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금쪽같이 아껴써도 항상 모자라 돈이 떨어지는 날부터는 밥을 굶어야 했다. 돈이 없어 아들에게 밥을 지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그 한서린 얼굴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한강변에 위치한 서부이촌동에는 곧 아파트가 들어서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렇다는 말만 듣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이 온데간데없었다. 한나절 만에 집이 감쪽같이 철거되어 버린 것이다. 며칠 안에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말이 나돌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나마 무허가 집이라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였다. 거기서 사글세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혜택도, 아무 대책도 없었다. 아버지도 나도 무척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판자들을 하나둘 주워다 오막살이 같은 임시거주지를 만들어 몇 달을 지냈다.
그러다가 이렇게는 공부는커녕 생활조차 안 되겠다 싶어, 외가쪽 친척의 도움을 받아 그 집 아이들의 입주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비록 남의집살이였지만 적어도 먹고 자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나는 감사했다. 그 친척집에 머무는 동안 나는 책도 많이 읽고 시도 쓰고 수필도 썼다. 내가 문학소년이 된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하는 ‘문학의 밤’ 행사에서 자작시 낭송도 하고, 교회 청년모임에서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1학년 2학기부터 2학년 여름방학까지는 그렇게 편안하고 즐겁게 보냈다. 그 집 아이들에게 수학이나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고, 친척이 많이 배려해 주어 처음으로 자유와 풍요를 누려보았다. 물론 내게 공부하라고 종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학년 2학기 때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셨다. 우리는 바닥이 기울어져서 자다 보면 한쪽으로 몸이 쏠리기까지 하는 허름한 단칸방을 얻었다. 드디어 오랫동안 떨어졌던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가난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어 행복했고 무엇보다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 감사했다.
3. 10원짜리 우동국물
고3이 되어 처음 본 실력고사에서 나는 전교 24등을 했다. 학교에서는 상위 10등 안에 드는 학생들을 ‘베스트10’이라고 불렀다. 그 10명의 이름과 점수를 적은 종이가 커다랗게 나붙고, 간단한 상도 주었다. 나는 조만간 전교 10등 안에 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당시 학교에서는 도서관의 일부를 독서실로 개조해서 방과 후부터 밤 10시까지 자습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좌석이 모자라다 보니 늘 자리경쟁이 심했다. 나는 수업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가서 자리를 차지하고는, 매일 밤 10시까지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갔다. 그러니 저녁까지 도시락이 두 개 필요했지만, 우리집 형편에 차마 도시락을 두 개 싸달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나는 집에 도착하는 밤 11시가 되어서야 저녁밥을 먹고 잘 수 있었다. 당시 10원짜리 삼립 크림빵이 처음 나왔는데, 배가 고파오는 저녁때면 그거 하나 사먹는 게 소원이었다.
두 번째 실력고사에서는 간발의 차로 ‘베스트10’에 못 들었다. 11등. 엄청난 성적향상이었지만, 나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약이 많이 올랐지만 하소연하거나 도움을 청할 상대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성적을 잘 내자 담임선생님이 크게 놀라셨다. 선생님은 내가 어려운 형편에서 공부한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 주셨다. 덕분에 외환은행으로부터 당시로는 상당한 액수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후로는 남들처럼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가지고 다닐 수 있었고, 추운 겨울날엔 10원짜리 우동국물을 하나 사서 찬 도시락과 함께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우동국물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사했던지.
그 다음 실력고사부터 나는 줄곧 ‘베스트10’에 들었고, 한 번도 후퇴하지 않았다. 성적은 계속 상승곡선을 그렸다. 경쟁상대였던 다른 친구들은 국영수는 물론 사회, 역사 등의 과목도 족집게과외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친구들을 이기는 길은 오직 수학과 영어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것뿐이었다. 그야말로 ‘선택과 집중’이었다고나 할까.
고3 한 해 동안 주말이고 휴일이고 없이 자습실에서 공부를 했으나, 자습실에 들르지 않는 날도 며칠 있었다. 그중 하루는 대성학원 등 학원가에 가서 돈을 벌어오는 날이었다. 학원마다 실력고사가 있어서 거기서 입상을 하면 적지 않은 상금을 줬다. 나는 거기에 출전해서 상금을 타다가 살림에 보태곤 했다. 또다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오랜만에 2학년 때까지 다니던 남산교회에 들러 친구들도 만나고 크리스마스 예배도 드렸다.
당시 눈이 침침하게 잘 안 보이고 귀에서 소리도 나는 이명증까지 생겨서 무척 고생했는데, 아마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눈을 혹사한 탓이었던 것 같다. 나는 기도했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몸에 더 이상 문제가 생기지 않게 돌봐달라고.
나는 경기고등학교 3년을 통틀어 전교 6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 입학시험에서는 법대 수석보다도 높은 점수를 받아 공과대학 시험을 치른 경기고 친구들을 모두 물리쳤으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학교 학생에게 2점 차이로 수석을 뺏겼다. 남에게 지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던 내가 수석을 놓친 것이다. 당시로서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안타깝고 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만약 그때 내가 수석을 했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도전할 상대가 없다고 착각하고 자만하여 더 이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 달리는 나의 삶의 태도는 이때 규범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4. 맨땅에 헤딩하듯 공부한 반도체
1970년 초반 당시, 한국의 반도체수준은 걸음마단계였다. 이렇다 할 체계적인 이론이나 자료가 없어서 스스로 찾아 공부해야 했다. 그러다가 74년 말 미국에서 현대적인 반도체를 공부한 분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사정이 많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분이 바로 ‘한국 반도체의 대부’라고 불리는 과학원(KAIST)의 김충기 교수다.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페어차일드사에서 근무한 교수님은 나같이 반도체를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내가 약 10년 후에 찾아가 반도체개발로 일본을 집어삼키겠다고 했을 때 ‘세상에서 목구멍이 제일 큰 놈’이라고 하셨던 분이다.
당시에는 반도체를 공부하는 학생이 거의 없다 싶을 정도로 적었으며, 과학원에 관련과목이 개설된 것도 아니고 실험실도 없었기 때문에 김 교수님이 강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와 몇몇 서울대 대학원 학생들은 ‘얼씨구나’ 하고 교수님을 모시고 세미나도 하고 학술토론도 하는 등 교수님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과학원이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당시에는 서울공대와 과학원 사이에 라이벌의식이 강했다. 내가 반도체공부를 한답시고 홍릉에 있는 과학원을 들락거리자 서울대에서는 ‘찍힌’ 학생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나는 학부와 대학원 시절 내내 반도체와 함께했다. 돌아보면 그렇게 열심히 열정적으로 공부한 적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것 같다. 그때의 그 공부는 후에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석사과정에서 반도체연구를 할 때는 두 발을 날려버릴 뻔한 적도 있다. 당시 반도체연구로 죽이 맞았던 박영준(현재 서울대 전기공학과 교수)이라는 1년 후배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재료공학과 실험실을 빌려서 반도체장치를 설치하고 실험을 하곤 했다. 하루는 반도체설비의 청정상태를 만들기 위해 황산, 질산 같은 강한 산성재료를 넣은 청정액을 끓이고 있었다. 청정액을 유리용기에 담아 부글부글 끓이는데, 유리용기가 그만 열을 받아 깨져버렸다. 순식간에 20평 남짓한 실험실 바닥에 청정액이 좍 깔렸다.
실험실 바닥에는 수소와 산소를 보관하는 통이 여러 개 놓여 있었는데, 그것들이 청정액에 녹아버릴 경우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깜짝 놀란 우리는 양동이로 물을 퍼다 부으면서 청정액을 닦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나중에 발이 쓰려 쳐다보니 발바닥이 피로 얼룩진 듯 벌겋게 되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슬리퍼와 양말이 강한 산에 녹아 발에 붙어버린 것이었다. 하마터면 두 사람 다 발이 날아갈 뻔했다.
실험을 하려 해도 제대로 된 반도체장비도 없고 제대로 가르쳐줄 사람도 없어, 나는 늘 발로 뛰어다니며 재료를 구해다가 직접 만들어서 실험과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청정액사건 같은 안전사고도 여러 번 겪었다. 당시 과학원 말고 반도체를 연구하고 실질적인 제작실험도 할 수 있는 곳이 딱 두 군데 있었다. 후에 삼성반도체의 모체가 된, 경기도 부천에 공장이 있는 한국반도체라는 회사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였다. 나는 이 두 곳에 가서 배우기도 하고 웨이퍼 같은 반도체재료도 얻어오곤 했다. 몰래 쓰레기통을 뒤져서 쓰다 버린 웨이퍼를 가져다가 잘라 쓰기도 했다. 그렇게 얻어온 실리콘웨이퍼를 가지고 반도체소자를 직접 만들어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나는 인생을 반도체에 걸겠다고 결심했다. 70년대 중반 당시에는 반도체가 앞으로 중요해질 거라는 말을 흔히들 하곤 했지만, 정작 국내에서 반도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반도체는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는 나의 적성에도 맞는 분야였지만, 매우 어려운 학문이고 고도의 전문기술이었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수학과 물리에 도통하고 이를 응용해야 함은 물론 다차원의 공간지각 능력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분야로, 다른 공대생들은 거의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반도체의 특징이 나의 도전정신을 자극했고, 산을 하나하나 넘으며 새로운 것을 알아낼 때마다 느끼는 보람과 쾌감이 나를 유혹했다. 어려서부터 미술과 조각, 디자인 등에 유달리 관심과 소질이 많았던 것도 반도체의 설계와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반도체의 무한한 잠재력과 성공가능성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고, 오로지 순수한 학문으로서의 매력에 매료되어 밤잠을 설치곤 했다.
5. 팔목 잡혀 한 결혼
1976년, 애타게 바라던 미국 유학이 좌절됐다. 다른 건 몰라도 공부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쓴맛’을 본 적이 없었던 나의 상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입학허가를 받은 곳은 10여 군데나 되었다. 하지만 장학금을 주겠다는 학교가 하나도 없었다. 집안형편상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유학이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장학금수혜 대기자명단에 오른 학교도 대여섯 군데 있었지만, 끝내 장학금이 오지 않아 결국 ‘유학재수’를 하게 됐다.
‘우리집 형편이 한 학기 등록금이라도 대줄 수 있다면, 그래서 일단 유학을 갈 수만 있다면, 가서는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을 자신이 있는데……. 한 학기 등록금만, 한 학기 등록금만…….’
미국 명문대학에 유학가 있는 친구들 얼굴이 떠오를 때면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가난 때문에 받았던 상처와는 또다른 아픔이 가슴을 쳤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원에서 알게 된 김도현 형(현재 국민대학교 교수)이 ‘소개팅’을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형은 샘터사에서 편집기자로 일하는 ‘김씨 아가씨’라고 있는데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으니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아가씨면 아가씨지 ‘김씨 아가씨’는 또 뭐냐며 이름을 물었더니, 일본어학원에서 알게 된 사이인데 학원에서는 일본식으로 ‘김상’ ‘이상’ ‘진상’이라고만 부르기 때문에 이름은 모른다고 했다. 나는 ‘내가 지금 여자나 만날 처진가’ 하는 생각에 처음에는 그냥 흘려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다가 불현듯 ‘김씨 아가씨’가 일한다는 샘터사에 한번 들러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처량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누군가 만나 이야기나 좀 하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었다.
당시 샘터사는 을지로 5가에 있었는데, 그 건물 지하다방에서 전화를 걸었더니 ‘김씨 아가씨’는 무척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속으로는 ‘이거, 괜한 짓을 했나’ 싶었지만, “김도현씨를 아시지요? 소개를 해주겠다고 하던데 지금 지하다방에 와 있으니 좀 내려오실 수 있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녀는 곧 내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대면을 하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 어색해하다가, 썰렁한 분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스무고개로 이름 알아맞히기를 하자고 했다. 때로는 이름을 모르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스무고개를 넘기기 전에 ‘혜경’이라는, 드물지 않은 그녀의 이름을 쉽게 알아맞힐 수 있었다.
그녀는 서울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아가씨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도 나처럼 가난한 집안에서 장녀로 어렵게 자란 것 같았다. 스무고개 이후 별다른 화젯거리를 찾지 못한 우리는 한 시간가량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후로는 내 처지가 그래서였는지 그녀와의 만남도 지지부진했는데, 무릇 세상의 모든 인연이 그러하듯 갑자기 그녀와 부쩍 가까워지는 계기가 생겼다.
그때는 지금처럼 휴대폰이나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전화나 편지가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는데, 전화조차도 귀한 시절이라 우리집에 전화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만나고 헤어지면서 다음에 만날 날을 미리 ‘예약’해서 만나야 했다. 그런데 8월 어느 날 만나기로 약속한 그녀가 나타나질 않았다.
갑자기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일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갑자기 회사에서 2박 3일 일정으로 편집회의를 떠났다고 했다. 혹시 연락이 오면 그렇게 전해달라고 했단다.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떠났다는 것이다. 안도감과 함께 어느새 그녀가 내 마음에 성큼 들어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후로는 만남이 잦아졌다.
당시에는 서울공대가 태릉 근처에 있었다. 청계천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가려면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야 했다. 키 작은 그녀가 힘들게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애처로워 내 팔을 대신 잡으라고 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싫다고 하더니, 힘이 많이 들었는지 못 이기는 척 팔짱을 끼었다.
나중에 하는 말이, 자기는 팔짱을 낄 정도면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그런 사이인가 하고 엄청 망설였단다. 내가 자꾸 팔짱을 끼라고 하니까 ‘저이는 나를 아주 가깝게 생각하나 보다’ 하고 팔짱을 꼈는데, 나중에는 팔목까지 잡혔으니 이 사람과 ‘진짜’ 가까이 지내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사람은 지금도 누가 “어떻게 결혼하셨어요?”라고 물으면 “발목이 아니라 팔목을 잡혀서 결혼했어요”라고 웃으며 말하곤 한다.
나중에 그녀에게 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느냐고 물었더니, 다짜고짜 회사로 찾아온 배짱과 자신감이 멋져 보였다고 했다.
그렇게 인연을 만들어가던 76년 그해, 처음으로 국비유학제도가 생겼다. 그것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쁜 희망이자 기회였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당당하게 국비유학생 1호로 선발된 나는 벅찬 가슴으로 내 삶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불행이 혼자 찾아오지 않듯 행운 또한 그런 것인지, 이듬해에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장학금도 받게 되어 장학금을 두 가지나 받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나는 안다. 나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임을. ‘김씨 아가씨’는 내 ‘헝그리 인생’에 찾아든 가장 큰 축복이자 선물이었다. 유학재수를 하지 않았다면 아내를 못 만났을 테니,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이 정도면 재수도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은가.
6. 국비장학생으로 유학길에 오르다
1977년 7월 10일 나는 ‘김씨 아가씨’를 아내로 맞았고, 8월 10일에는 아내의 손을 잡고 유학길에 올랐다. 국비장학금과 함께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의 장학금을 받고 떠나는 유학이었지만, 유학길에 오르는 내 발걸음은 희망과 기대로만 가득 차 있지 못했다.
연로하신데다 병중에 계신 아버지, 평생을 고생으로 살아오신 어머니를 떠나면서 혹시 이것이 두 분을 마지막으로 보는 게 아닐까, 내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국에서의 삶에 대한 두려움도 커서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다행히 수업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것, 더 깊이있는 학문을 접한 기쁨이 커서 서울을 떠날 때의 섭섭함, 부모님에 대한 걱정 등을 많이 덜 수 있었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전자공학 박사과정에서는 반도체와 관련된 물리, 수학, 플라즈마, 양자역학 등을 공부했다. 나는 전자공학과 반도체관련 기본과목의 기초가 꽤 탄탄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필기시험으로 치러지는 박사자격시험을 통과하려면 반도체 외에 다른 과목도 공부해야 했다. 그중 통신 등 다른 분야는 걱정이 없었지만, 컴퓨터관련 과목은 아주 어렵게 생각됐다. 그때까지 한국에서는 컴퓨터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컴퓨터와 관련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첫 번째 숙제가 나와 나름대로 열심히 답안을 작성해서 냈는데, 결과를 받아보니 거의 ‘빵점’에 가까운 점수였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공부깨나 한다고 자부하던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야, 이거 큰일났다’ 싶어 그 길로 교수를 찾아가, 혹시 내 영어에 문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스톤 교수가 파란 눈을 크게 뜨며 무미건조한 톤으로 말했다.
“You have no problem with your English. Your answer is wrong.”
(자네 영어에는 아무 문제가 없네. 다만 자네 답이 틀렸네.)
스톤 교수는 이름 그대로 돌처럼 딱딱하고 퉁명스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이 과목이 어렵긴 해도 박사자격시험을 위해 꼭 공부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수의 대답은 냉정했다. “Why don’t you drop it? If not, you will flunk.” (그럼 수강을 취소하게. 아니면 낙제할 거야.)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뱃속에서 확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기였다. 박사자격시험을 통과하려면 무조건 이 과목을 들어야 했으니 물러설 수도 없었다. 어디 한번 끝장을 내보자. 나는 곧장 컴퓨터설계에 관한 기초서적 세 권을 샀다. UCLA, USC 등의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는 책들이었는데 이걸로 기초부터 닦으려는 심산이었다. 밤을 새가며 새로 산 책과 기존의 고급강의 교재를 병행해서 공부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던 고급컴퓨터설계학도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다음 숙제는 20점을 받았고, 점점 점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두 과목은 기말 리포트만 제출하면 되었기에 미리 잽싸게 써버리고, 마지막 두세 달을 컴퓨터과목에 말 그대로 올인했다.
당시 매사추세츠 주립대 공과대학에는 깨지지 않는 전설 같은 게 하나 있었다.
“1층 학생이 2층에 올라와서 A학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과대 건물의 1층에는 반도체·통신 등의 학과가, 2층에는 컴퓨터학과가 있는데 1층 학과 학생들 중 컴퓨터공학 과목을 수강해서 A학점을 받은 적이 학과 개설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뭐, 까짓 거 한번 받아보자.’
드디어 기말이 가까워졌고 이제는 컴퓨터에 관해 제법 잘 이해하고 있었다. 기말고사를 치렀다. 상당히 잘 본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안타깝게도 A학점을 받기에는 간당간당한 점수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미국에 온 이래 모든 과목에서 A만 받았던 나의 학점역사에 유일한 오점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강의시간. 교수가 지난시간에 내준 숙제 중 가장 어려운 문제를 뽑아 학생들에게 앞에 나와서 풀어보라고 했다. 스톤 교수의 수업 시간에 나가서 문제를 푸는 일은 상당한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는데 문제를 푸는 학생들은 주로 유대인 학생들이었다.
그날도 어느 유대인 학생이 나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칠판에 분필로 쓱쓱 써나가는데 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나는 저 문제를 다르게 풀었는데.’ 나는 내 풀이방식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마침 교수가 문제를 푸는 학생을 저지했다. 틀렸다는 의미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손을 번쩍 들었다. 순간 스톤 교수의 표정이 알싸해졌다. ‘쟤가 공부하다 아예 미쳤나?’ 하는 표정이었다.
“Mr. Chin.”
교수가 힘주어 호명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나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3분의 2 정도 풀었을까? 교수가 됐으니 그만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머지는 안 봐도 정답이라는 의미였다.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머쓱하게 자리로 돌아왔다. 유대인 학생들이 뒤돌아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학기 성적표를 받아들던 날, 나는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성적표를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고급컴퓨터설계학 과목 옆에 큼지막하게 A가 박혀 있는 게 아닌가. 마지막 시간에 난제를 풀었던 것이 보너스 점수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날 내 몸은 도체(Conductor)였다. 온몸에 전기가 좌악 흘렀다. 밤새며 고군분투하던 날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1층 학생’으로는 최초로 ‘2층 고지’를 탈환함과 동시에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2년간 수강한 모든 과목에서 올A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의 ‘휴지통’이라는 소식란에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작은 기사가 하나 났다.
‘국비유학생 제 1호 진대제, 전과목 A 받아.’
7. 실리콘밸리의 품에 안기다
매사추세츠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자격시험에 합격한 나는, 1979년 초 비슷한 반도체분야의 스탠포드대학 더튼 교수에게 연락해, 전학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더튼 교수는 전과목 A를 받은 내 성적과 논문을 보고는, 입학허가는 물론 장학금도 검토해 본 후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2월이 훌쩍 지나가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는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더튼 교수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벨이 길게 울린 후 더튼 교수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은 어디 출장을 갔다가 방금 사무실에 들어왔고 15분 정도 있다가 또 해외출장을 가야 한다면서 “마침 그 짧은 순간에 전화를 했구먼” 하며 반가워했다. 나는 얘기 끝에 장학금에 대해 물었다.
“아니, 그게 아직 해결이 안 되었단 말인가? 내가 두 달 전에 얘기를 해두었는데……
대제, 잠깐만 기다리게, 내가 알아보고 전화해 주지.”
한 30분쯤 기다렸을까, 더튼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 이제 되었네. 장학금을 주는 것으로 결정해 두었으니 금방 연락이 있을 거야.
그런데 졸업하면 바로 올 수 없을까? 여름방학부터 연구를 시작하면 좋겠는데.”
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잘못하면 여름에 오갈 데 없이 놀아야 할 판인데,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나는 당연히 그 제안을 받았들였고, 남들보다 3개월 앞선 6월부터 스탠퍼드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무엇이든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스탠퍼드대학으로 옮겨온 첫 학기 말에 박사진입자격시험(Qual)에 합격한 나는 승승장구 거칠 것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어려운 점은, 가족이 셋이다 보니 살림규모도 커지고 매사추세츠에 있을 때보다는 아파트 임대료와 생활비 등이 모두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의료보험도 비싸서 집사람과 아들애 보험을 미처 들기 전에 그만 둘째가 생겼다. 스탠퍼드대학병원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좋은 병원이지만 비용이 너무 비싸서, 우리는 산호세에 있는 가톨릭계 오코너병원에서 아기를 낳았다. 다행히 우리 사정을 들은 사회복지사가 출산비용을 600달러로 산정하고, 그것도 한 달에 50달러씩 1년에 걸쳐 갚게 해주었다. 보험료보다 싸게 아기를 낳은 것이다.
집사람은 그때도 남의 아기를 두셋 돌봐주고 받은 돈으로 서울 부모님께 조금씩 송금도 하고 살림에도 보태고 있었다. 예정일을 3주 앞두고 일을 쉬면서 출산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둘째가 그만 3주 빨리 태어나는 바람에 출산하기 전날까지 하루도 쉬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나는 1981년 7월부터 스탠퍼드대학 한국학생회 회장을 맡아 금요 테니스경기, 가족캠핑, 한국식품점에서 식품 공동구매하기, 여름에 새로 오는 신입생들 자리잡는 것 도와주기 등 그동안 한국학생회에서 해오던 활동을 좀더 체계화하고 적극적으로 펼쳤다.
또 국제센터(외국인 학생들을 도와주기 위한 학내기관)와 샌프란시스코 주재 한국영사관의 협찬을 받아 ‘한국의 날’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이 행사에는 주변에 사는 한국인들을 많이 초대했는데, 그중에는 어릴 때 입양되어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살아왔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한국무용 하는 분도 모셔오고 윷놀이도 했는데, 부인들은 한복을 입고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일을 거들었다.
학생회가 커지자 모임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녀회장을 뽑았는데, 현재 대전과학원의 황규영 교수 부인인 송정혜 여사가 두 발 벗고 힘써주었다. 우리는 회칙을 새로 만드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학생회를 체계화하고, 매달 회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에너지가 충만해 무엇이든 열심히 즐거운 마음으로 해내던 시절이었다.
8. 호텔에서 만난 하느님
스탠퍼드에서 박사논문이 거의 마무리될 즈음이던 1982년 11월, 보스턴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의 초청으로 논문을 발표하러 갔다. 집을 떠나 호텔방에 혼자 누워 있으려니 가족 생각도 나고 쓸쓸해지더니 문득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벽촌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온 시간들. 가난을 헤치며 꿈꾸고 도전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순간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오다 잠시 멈추어서서 뒤돌아보니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뭔가 뭉클하게 솟구쳐오르는 뜨거움이 있었다. 감사의 마음이었다.
‘오늘날 내가 여기 서 있는 것은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랬다. 순간순간 나를 일으켜준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껏 이토록 열심히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600원의 첫 장학금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등록금을 낸 기억이 없었다. 이렇게 세계적인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좋은 논문을 쓰게 된 것도 나 혼자의 힘으로 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때 집안이 풍비박산났는데도 공고가 아닌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일, 대학에 가서 당시 가장 각광받던 반도체를 전공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일, 더튼 교수가 출장 사이에 잠시 사무실에 들렀을 때 기적적으로 전화통화가 이루어진 일 등이 모두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돈이 없어서 유학의 꿈이 좌절되었을 때 국비유학제도가 생겨 유학올 수 있었던 일, 박사학위를 무사히 마치고 이미 IBM 취직이 확정된 일이 모두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항상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긴 했지만, 늘 그 이상의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정말 감사할 따름이었다. 세상에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한 가지 답하기 어려운 것은 ‘감사하긴 한데 누구한테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숨가쁘게 뛰어온 도전의 갈래마다 나를 도와준 누군가가 있다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이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문득 나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성경이었다. 불현듯 혹시 사람들이 말하는 신, 혹은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내게 길을 만들어준 장본인도 바로 그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경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열심히 믿었지만, 서울에 혼자 떨어져 있던 나는 주말이면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곤 했다. 일요일에 특별히 할 일도 없었고 찬양대에 들어가면 점심을 잘 먹여주니 일요일 예배와 토요일 학생예배에 가끔 나가곤 했다. 그러나 특별한 신앙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곳의 친구들과 어울려 교회 월간지도 만들고 어울려 노는 것에 더 집중했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보스턴의 밤을 밝히며 읽은 성경말씀은 내게 무언가 다르게 다가왔다.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영적인 감동이랄까. 나는 종교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 오수영 박사라고 독실한 천주교신자가 있었다. 고교 및 대학 선배이기도 한 그는 스탠퍼드에서도 같은 교수 밑에서 공부할 정도로 나와는 인연이 깊었다. 언젠가 그 선배 가족과 보름 정도 미국 서부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를 보면서 ‘어쩌면 인품이 저렇게 훌륭할까’ 하고 부러워했었다. 한마디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였다. 갈수록 선배의 성품과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본받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선배의 삶의 구심점이 바로 종교였다.
보스턴에서 돌아와 오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따졌다. “왜 우리더러 교회에 같이 가자고 안 하느냐?”고. 그랬더니 껄껄 웃으면서 “이제 너도 성당 다닐 때가 됐냐?”라며 흐뭇해했다. 그러고 몇 달이 지나 나는 성당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수요일에 마침 미사가 있다고 해서 성당을 찾았는데, 그날이 바로 ‘애시웬즈디(Ash Wednesday)’라고 불리는 ‘재의 수요일’이었다. 나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가보는 성당이었는데, 그날의 미사는 특별히 장엄하게 치러졌다.
신부님이 내 이마에 재를 발라주는 순간, 가슴에 뭔가 뭉클하게 솟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 교리공부를 시작했고 주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면서 나는 내가 감사할 대상이 하느님이라는 확신을 조금씩 굳혀갈 수 있었다. 나는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리고 83년 부활절에 우리 부부는 영세를 받았다. 그런데 왠지 모를 서러움이랄까, 감격이랄까, 그런 감정이 북받쳐올라 우리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 속에 녹아 있던 회한이 눈물이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감사의 마음도 억누를 길 없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데 그때 심연 어디선가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 대제야! 실컷 울어라.”
9. IBM을 떠나며
내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끝낸 것은 1983년 5월이었다. 당시에는 오일쇼크로 불경기가 계속되어 박사학위 보유자, 그것도 외국인 학생을 뽑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다행히 상당히 높은 연봉을 받고 IBM에 입사하게 되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이자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IBM이라면 나의 꿈을 펼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IBM의 두뇌인 왓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것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기술을 섭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매달 한 건씩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특허출원을 해보자고. IBM은 각종 기술과 정보의 보고였지만, 나는 이미 반도체소자 분야의 이론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새로운 것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반도체소자를 직접 만드는 공정기술 분야를 경험해 보고 싶어졌다.
사실 내게는 나 자신과의 굳은 약속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기술을 제대로 섭렵했다고 판단되는 날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겠다는 것이었다. 메모리기술을 전반적으로 익히는 것이 한국에 돌아갔을 때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 나는 공정분야로 옮기기를 희망했다. 다행히 입사한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마침 자리가 생겨, 최대치인 15% 연봉인상과 함께 공정부문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IBM 연구소에서는 4M D램 개발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엄청나게 투자를 해가며 새로운 메모리기술을 극비리에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이런 새로운 기술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고, 버몬트주에 있는 IBM 반도체공장에도 자주 가볼 수 있었다. 당시 IBM의 메모리 수요는 엄청나서, 전세계에서 최대의 메모리반도체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기도 했다. IBM 반도체공장은 스탠퍼드대학의 자그마한 실험실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1년 정도 제조공정 분야를 익힌 다음, 나는 소자이론과 제조공정만 가지고는 메모리기술 전반을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있음을 깨달았다. 반도체설계를 익혀야 했다. 마침 스탠퍼드대학 동문 친구인 대만 출신의 루(Lu) 박사가 메모리설계 부분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어서 조언을 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능한 기술인력을 선발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시에는 IBM 내에서도 상호 인재 스카우트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설계부문에서 일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고, 회사 내에서의 내 평판을 잘 알고 있던 루 박사는 사내경쟁을 감안해 15% 연봉인상과 함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2년간 두 번이나 최대치로 연봉인상을 받으면서 월급봉투가 제법 두둑해졌다.
당시 루 박사의 팀은 세계 최고속 메모리칩(동작속도 25ns)을 설계하고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때 배운 지식과 기술은 후에 경쟁사보다 더 빠른 초고속 동작칩을 개발하는 데 훌륭한 응용기반이 되었다.
1985년 당시에는 유난히 경기가 나빠서 반도체업계도 구조조정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64K D램으로 기록적인 매출을 올리던 모스테크(Mostek)도 256K D램의 개발 실패로 거짓말처럼 그해 여름 문을 닫았고, 다른 대부분의 회사 또한 가격 급락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한국에도 메모리반도체 공장이 설립되어, 삼성전자의 경우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사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64K D램을 생산·판매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가 1달러 30센트의 제품을 30센트에 팔고 있었고, 이제 겨우 256K D램을 개발하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반도체산업의 중심이 미국을 떠나 일본과 한국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일본은 이미 반도체산업을 제패하며 미국을 앞지르는 강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하루도 잊지 않았던 나 자신과의 그 약속을 지킬 준비와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섰다. 한국의 반도체기업들 중 그나마 사정이 제일 나았던 삼성에 의사를 타진했더니, 실리콘밸리에 있는 현지법인 연구소에 자리를 만들어주겠다며 적극적으로 영입의사를 밝혀왔다.
나는 IBM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우선 가족들과 상의했다.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분은 어머니셨다. 나무랄 데 없이 만족스러운 직장이었던 IBM을 떠나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 한국 회사로 옮긴다는 것을 어머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다. 나 또한 일말의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반도체에다 돈을 쏟아붓는 이병철 회장 때문에 삼성그룹 전체가 망한다는 소문이 팽배해 있었다. 항상 내 결정을 존중해 주었던 집사람은 묵묵히 나의 뜻을 따라주었다.
주변의 동료들도 든든한 기반을 마련한 IBM을 떠난다는 나의 돌출발언에 크게 놀라워했다. 한국인 엔지니어들은 기술과 경력을 더 쌓기 위해 반도체메카로서 최고의 인프라를 갖춘 미국을 떠난다는 생각을 웬만해서는 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반도체를 하기에는 그 여건이 끔찍하게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이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어렵게 공부하고 익힌 기술을 조국을 위해 쓰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국의 반도체산업 전망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회사에 사직서를 내던 날, 나는 동네의 한국 사람들 대부분을 집으로 초청해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메모리반도체 사업이 뭔지, 한국의 반도체산업 현황이 어떠한지, 그리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내가 한국에 가서 개발하려는 4M D램은, 경제적 파급효과 및 과학기술의 급성장에 미치는 효과 등을 감안할 때, 그 폭발력이 국가안보를 위해 원자폭탄을 우리 힘으로 개발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당시 그동안 기다려왔던 영주권이 막 나왔다. 그런데도 최고의 직장인 IBM 연구소를 떠난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내 얘기를 들은 뒤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모두들 나의 이 선택이 일생을 건 도박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얘기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10. 일본을 삼켜 버리겠습니다
IBM에서는 사직서를 낸다고 그냥 내보내지 않는다. 반드시 퇴직인터뷰를 한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퇴사를 하는지, 혹시 극비문서 같은 것을 가지고 나가는 건 아닌지 물어보고, 나중에 IBM에 재입사할 수 있는 자격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결정하는 자리다.
나도 그곳의 관리담당(변호사 업무) 임원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영주권까지 주고 연봉도 남들보다 훨씬 많이 받는데 왜 옮기려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반도체산업의 중심이 극동아시아로 옮겨가고 있고, 한국이 현재는 엄청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상당한 성공가능성이 있다고 믿기에 뭔가 기여하고 싶어서 떠난다고 대답했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 IBM이 컴퓨터시스템 분야에서 이미 강력한 경쟁자가 된 일본 회사로부터 메모리반도체를 공급받고 있는데 이것이 장차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비일본 회사로서 새로운 메모리 공급 회사가 등장하면 IBM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나에게 몇 달치의 월급을 보너스로 주면서 언제라도 IBM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 인사처리 하나만 봐도 세계의 존경을 받을 만한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IBM의 매출은 약 700억 달러로 우리나라 총수출액과 맞먹었다. 공·사를 분명히 하는, 청교도적인 IBM의 엄격한 근무수칙은 나의 조직생활에 지금도 좋은 규범이 되고 있다.
1985년 10월 초, 나는 실리콘밸리 근처의 삼성반도체 미국 법인 연구소에 입사했다.
첫날을 정신없이 보내고, 그 다음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스탠퍼드의 은사 더튼(Dutton) 교수를 찾아갔다. 갑작스런 나의 방문에 깜짝 놀란 교수님이 “웬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IBM을 그만두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교수님이 정색을 하고 “왜 그만두었느냐?”고 물었다.
“I am going to swallow Japan!”
(두고 보십시오. 반도체분야에서 일본을 집어삼켜버릴 겁니다!)
교수님은 놀라움과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Are you crazy? You must be kidding!”
(너, 미쳤냐? 농담이겠지!)
조국에 돌아가 반도체산업을 일으켜 일본을 삼켜버리겠다던 다짐. 나의 그 다짐이 남들에게는 혈기 넘치는 젊은시절의 호언장담으로 들렸겠지만, 나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더튼 교수와의 이 대화를 한국에 돌아온 후 과학원의 김충기 교수님께 해드렸더니,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 네가 이 세상에서 목구멍이 제일 큰 놈이로구나!”
삼성 전자의 최연소 임원이 되다 삼성반도체 미국 법인에서 내가 처음 맡은 직책은 4M D램 개발팀장이었다.
그런데 삼성반도체 미국 법인에서 일하면서 두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었다. 하나는 내가 타고 있는 배가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한국 본사가 메이저리그라면 미국의 현지법인은 마이너리그였다. 좀더 큰 바다에서 활동하고 싶던 내게 삼성의 현지법인은 너무 작은 배였다. 다른 하나는 이 작은 배에서조차 조타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짜 실황이 벌어지고 있는 한국 본사에 가서 반도체개발이라는 전쟁을 직접 지휘하는 장수가 되고 싶었다. 그래야만 최대의 능력을 발휘해 차세대반도체 개발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지법인에서 나를 놓아줄 리 만무했다. 당시 삼성은 미국 법인과 한국 본사팀이 경쟁적으로 반도체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국으로 가면 한국 본사팀이 이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나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화도 나고 실망감도 컸다.
그런데 마침 이 소문을 들은 현대전자반도체 미국 현지연구소에서 접선을 해왔다. 당시 현대는 삼성 다음으로 반도체개발에 의욕적으로 매진하고 있었다. 한국의 삼성 본사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현지법인에서 안 놔주려고 한다고 했더니, 이천에 있는 현대 본사로 구경을 가자고 제의했다. 현대에서는 한국의 본사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길로 삼성에 사표를 내고 잠적해서는 몰래 한국행 비행기를 타버렸다.
다음날 이를 알게 된 삼성에서는 난리가 났다. 현지법인에 있는 한국 사람들이 사방팔방으로 찾아다녔다. 집까지 찾아와 행방을 다그치니까 집사람이 할 수 없이 한국으로 현대전자를 방문하러 갔다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삼성에서는 진짜로 난리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삼성반도체 관계자를 내게 보냈다.
“어떻게 해주면 삼성으로 돌아오겠소?"
“한국으로 오고 싶습니다. 미국 현지법인은 제 꿈과 실력을 펼치기에 너무 작습니다.”
“좋소, 그건 알아들었소. 본사로 발령을 내주겠소. 더 요구할 게 있으면 말해보시오.”
“제게 임원자리를 주십시오. 제가 현지법인에서 책임연구원 정도로 있다 보니 일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임원급이 아니면 연구팀을 지휘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배짱 좋은 요구에 삼성반도체 관계자는 금방 답변을 하지 못하고 한참 망설이더니 나에게 물었다.
“진 박사, 올해 나이가 몇이오?”
“서른다섯 살입니다.”
내 대답에 그는 매우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 또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좋아요, 한번 건의해 보겠소. 임원이 되는 것은 이병철 회장님의 승낙이 필요한 사항이오. 혹 회장님과 면접을 할 수도 있으니 대기하고 있어요. 워낙 바쁘시니 일정을 맞추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이병철 회장과의 면담시간이 잡혔다는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15분쯤 만나뵙고 인사하는 정도의 면담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삼성 본관 회장실로 올라가는데, 동행한 직원들이 내가 아는 것과 자신들이 회장에게 보고한 내용에 어긋나는 점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이렇게 보고가 되어 있으니 조심해 달라는 부탁도 했다. 그냥 할아버지같이 편하게 생각하고, 우선 나이가 몇 살이고 이름이 무엇이며 고향이 어디인지부터 얘기하라는 당부도 있었다.
27층의 회장비서실에 들어서니 대형테이블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이 일제히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테이블의 끝자리에는 이병철 회장이 앉아 있었다. 긴장감에 몸이 조금 뻣뻣해졌다. 사람들이 나가고 이병철 회장과 나, 비서실장과 신현확 회장, 이렇게 네 사람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름은 진대제라고 하고, 경상남도 의령 출신이며,
나이는 만으로 서른다섯 살입니다.”
“그래, 그래.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차분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음성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나와 고향이 같다. 그래서인지 말이 아주 잘 통했다. 마음이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대화도 자연스럽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면담시간은 처음 예정됐던 15분을 훌쩍 넘겨 50분까지 늘어났다. 주로 반도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회장은 반도체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정통했고 반도체사업에 진한 애정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본사로 들어오면 4M D램과 16M D램을 맡아서 연구할 것이며 일본을 이기고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포부를 말씀드렸다. 이 회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일을 잘해보라는 격려를 마지막으로 나는 회장실을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15분이면 끝날 줄 알았던 면담이 길어지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서 무슨 얘길 하는지 무척 궁금했다는 것이다. 이병철 회장과의 면담은 임원자리를 간접적으로 약속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이 회장이 직접 그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원하는 대로 다 해주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35세의 임원이 삼성, 아니 국내 최초로 탄생한 순간이었다. 해외에서도 그런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나는 삼성에서 내 꿈과 도전을 펼쳐보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반도체를 바라보는 이병철 회장의 마음과 비전이 과학자인 나의 마음에 와닿았으며, 내가 실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삼성반도체라는 확신이 섰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였다.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는 사력을 다해 뛰어드는 일만 남아 있었다.
곧바로 미국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삼성 측에서 출국하기 전에 아파트부터 먼저 알아보라고 했다. 귀국하면 살 아파트를 한 채 얻어줄 테니 위치나 크기를 정해주고, 어떤 가구가 필요한지도 알려주면 준비해 두겠다고 했다. 가구는 필요없다고 했으나 한 번 더 골라보라고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미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 한 2주 정도 하와이 같은 데서 놀다 오라고도 권했다.
“아이구, 노는 게 어디 있습니까? 빨리 와서 일해야지요. 짐만 챙겨서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반도체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1분 1초가 아쉬웠다. 내 성격에 논다든가 쉰다든가 하는 말은 사전에 없는 얘기였다. 그렇게 나는 1987년 9월 4일 기흥에 있는 삼성반도체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2. 16M D램을 개발하던 날
“에이, 16M D램 팀장이 재수가 없어서 일이 이렇게 안 되나?
이거 원, 팀장을 바꾸든지 해야지…….”
새벽같이 출근을 하니 상무가 나 들으라는 듯 툭 한마디 던진다.
그렇지 않아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출근했는데 상사가 대놓고 눈치를 주니 얼굴이 화끈거려 도저히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슬그머니 검사실로 내려갔다. 1989년 10월하순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날은 삼성기술대상을 받기 위해 16M D램의 완전동작 칩을 꼭 개발하여 그 결과를 제출해야 하는 마감일이기도 했다.
당시 회사에서는 16M D램의 완전동작 칩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었고, 만약 우리 팀이 완전동작 칩을 개발할 경우 삼성기술대상을 거머쥐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칩 개발에 실패할 경우 시상식 자체가 무산될 뿐만 아니라 회사의 운명마저도 장담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반도체라는 것이 그렇다.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갈리고, 개발시기가 조금이라도 늦어질 경우 회사 문을 닫는 것은 시간문제다. 당시 삼성은 반도체에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고 있었는데, 세간에 ‘삼성이 저러다가 망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상황이 그런데도 16M D램의 완전동작 칩 개발은 요원하기만 했다. 지난 2년간 거의 모든 휴일을 반납하고 밤을 새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건만, 1천 6백만 개가 넘는 메모리셀이 모두 동작하는 완전동작 칩은 개발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지금까지 사용하던 연구소시설(FAB라 부르는 청정시설)도 곧 문을 닫을 처지에 놓여 있었다. 16M D램의 완전동작 칩이 나오지 않는 원인 중 하나가 공장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들이었는데, 이 문제가 도저히 해결되지 않자 회사 경영진에서 아예 공장을 새로 짓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반도체 표면에 미세한 먼지가 앉으면 불량이 나기 때문에, 반도체공장은 청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문제는 새로운 시설로 이전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실험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적어도 몇 달은 16M D램 칩을 만들어볼 수 없다는 얘기다. 때문에 연구소를 닫기 전에 생산되는 마지막 웨이퍼(실리콘기판)가 내게는 남아 있는 유일한 기회인 셈이었는데, 바로 그날이 최종으로 제작한 20여 장의 웨이퍼가 나오는 날이었다. 그야말로 운명의 날이었다.
검사실에 내려가니 우리 팀의 테스트기술자들이 마지막으로 제작된 웨이퍼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앉아서 꼼꼼하게 결과를 검토하기 시작했으나, 20장에 있는 2천여 개의 칩을 모두 테스트해 봐도 완전히 동작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완전동작 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완전동작하는 16M D램이란 정확하게 16,777,216비트가 모두 동작하는 반도체칩을 의미한다. 16메가(16,000,000)보다 좀더 많은 비트 수지만 편의상 16M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나온 웨이퍼는 정말 ‘죽고 싶도록’ 아쉽게도 210비트가 모자랐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지만, 단 한 비트라도 동작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반도체다. 그야말로 ‘화룡점정’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 ‘마의 210비트’를 어떻게 살리느냐가 관건이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발상을 전환해 보자’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당시 우리가 설계한 16M D램은 내부구조가 극도로 정밀하고 민감한 나머지, 그전 세대의 반도체에 사용되던 5V 전압을 쓰면 전계가 너무 강해져서 얇은 산화막들이 망가질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내부에서 다시 4V로 전압을 낮춰 사용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즉, 외부에서 일반 전압인 5V를 가해도 반도체 내부에서는 4V로 내리니 외부 전압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구조였다.
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외부 전압은 당연히 5V를 가해야 한다’는 통념을 깨보기로 한 것이다. ‘만약 외부 전압을 내리거나 올린다면 내부의 전압이 약간이라도 변화하게 될 것이고, 혹시 죽어 있는(동작하지 않는) 210여 비트 중 일부가 살아나지 않을까?’ 그때까지 고개를 떨구고 낙심해 있던 기술자들에게 전압을 좀 낮춰보라고 지시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술자들이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전압을 조금 낮췄다.
어! 그랬더니 동작상태가 훨씬 좋아지는 것 아닌가. 그러다 조금 더 내리니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아니 믿을 수 없게도, 완전동작 칩이 만들어진 것이다. 머리털이 다 쭈뼛해졌다.
희열과 함께 ‘우연은 아닐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기대와 흥분이 서린 눈초리와 마른기침 삼키는 소리, 정말 내장이 다 타는 것만 같았다.
쿵쿵쿵,
터질 듯 뛰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이번엔 전압을 다시 올려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동작이 안 되는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다. 다시 전압을 천천히 내려보라고 했다. 그러자 다시 완전동작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전압을 올리고 내리며 검증해 보기를 수십 차례,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2층 검사실에서 5층 사무실까지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외쳤다.
“나왔다!”
일요일까지 회사에 나와 가슴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던 기술자들과 여직원들 몇백 명이 동시다발로 환호성을 질렀다. ‘공돌이’ 진대제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미쳤냐는 소리를 들으며 미국 IBM을 박차고 나오면서, “조국에 돌아가서 반드시 반도체로 일본을 집어삼키겠다”고 했는데 그 가능성이 마침내 실현되려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를 두고 어느 월간지 기자가 그랬던가. ‘땅땅한 경상도 사나이’라고. 그 땅땅한 경상도 사나이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땀에 전 연구복 소매로 눈물을 쓱 훔쳐냈다. 반도체 회로도로 도배되다시피 한 연구실의 천장과 벽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말 그대로 99%의 땀과 1%의 영감이 이루어낸 일이었다. 그날 나는 에디슨이 부럽지 않았다.
1989년 10월 22일 일요일, 그렇게 16M D램의 완전동작 칩이 탄생하던 날, 기흥연구소 직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아냈다. 16M D램의 완성이 회사는 물론 국가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잘 알기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모두들 흥분과 감격에 겨워 발을 굴렸다. ‘쿵쿵쿵’ 발 구르는 소리에 5층건물이 다 흔들렸다. 누가 봤으면 대한민국 축구팀이 월드컵 4강, 아니 우승이라도 한 줄 알았을 것이다.
그해 말 우리 연구진은 당당하게 삼성기술대상을 수상했다. 나로서는 87년 4M D램 개발로 삼성기술대상을 받은 이래 두 번째로 기술대상을 받는 것이었다. 물론 상당한 보너스가 주어져서, 전직원이 “너무 좋아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며 회식깨나 했다.
그날 저녁 나는 회사일 때문에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지 못했던 아내와 아이들을 거실에 불러모아 눈물의 감사기도를 드렸다. 청원기도가 아닌 감사기도의 가치를 새삼 느낀 순간이었다.
가족들이 곤히 잠든 한밤중, 나는 홀로 거실에 나와 베란다 창가에 섰다. 잠이 오지 않았다. 기쁨과 흥분이 어느 정도 가시자 대신 가슴 가득 고뇌가 채워졌다. 반도체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인데, 이 살벌한 전쟁터에 이제 겨우 한 발을 걸친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완전동작 시제품을 얻은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 너무도 많은 할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12. 16M D램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다
완전동작하는 16M D램을 기적적으로 개발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기쁨과 감격을 누리기에 나는 너무 바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미국 출장을 준비했다. 한시라도 빨리 반도체 종주국인 미국에 가서 우리가 만든 반도체 샘플을 보여주고 평가를 받아 판로를 개척해야 했다. 미국에 도착해 처음 방문한 곳은 반도체의 최선두업체 IBM이었다.
IBM은 ‘I Buy Memory’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반도체메모리의 최대 구매자이자 소비자였다. 그런 IBM에 삼성은 256K D램을 저렴한 가격에 납품하고 있었는데, 경쟁사가 새로운 기술인 CMOS를 적용하는 데 비해 삼성은 낙후된 NMOS 기술만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타사 제품에 비해 불량률이 높은 편이었는데, 이날 IBM 간부들과의 회의도 높은 불량률 때문에 심하게 타박을 듣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1M D램 영업담당이 삼성의 1M D램을 IBM이 구매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256K D램 불량이나 빨리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계속 핀잔만 터져나왔다. 4M D램을 평가해 달라는 얘기는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IBM의 구매담당 매니저는 회의중에 심지어 졸기까지 했다. 괘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1M, 4M에 이어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We brought a few fully working 16M DRAM samples.”
(완전동작하는 16M D램을 가져왔다.)
졸던 구매담당 매니저가 눈을 번쩍 떴다.
“What did you say?” (뭐라고?)
“Here are two fully working 16M DRAM samples.”
(여기 완전동작하는 16M D램 샘플 두 개를 가져왔다.)
“Really? Really?” (정말이냐? 진짜냐?)
“Sure!” (물론!)
좀 놀란 표정이었다. 고쳐앉아 칩을 들여다보던 그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우리 16M D램 샘플을 들고 급히 사무실을 나갔다.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다른 회사의 제품과 비교해 보려는 것이든지, 아니면 삼성이 허풍을 늘어놓는 것은 아닌지 알아보려는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왔다. 흥분을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넘겨짚어 물어보았다.
“혹시 그게 IBM에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16M D램 샘플 아니냐?”
졸음기가 싹 가신 그는 IBM의 보안사항이기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도 눈치가 눈치인지라, 다음날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 보스턴의 DEC(Digital Equipment Corp)사에 혹시 16M D램 샘플을 입수한 적이 있는지 문의해 봤다. 대답은 “No”였다. ‘설마’ 하던 우리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우리가 미국 시장에 16M D램을 가져온 최초의 공급자라는 의미였다. 놀라움과 기쁨에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 가실 줄을 몰랐다.
다음날 DEC사와의 회의는 전날과는 너무나 달랐다. 우리가 16M D램 샘플을 가져간다고 하니 50명 정도의 직원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부사장급의 고위임원도 서너 명 있었다. 물론 회의는 전날과는 정반대로 16M D램부터 시작해 4M, 1M 순서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DEC사의 몇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와서 16M D램을 찍어댔다. 그날 흥분한 것은 삼성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DEC사 직원들이 우리를 보스턴의 고급 맥주집에 초대했다. 모두 우르르 몰려가서 밤 12시까지 술을 마시고 떠들어댔다. 상식상 판매자가 고객을 접대하기 마련인데 고객으로부터 술대접을 받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얻어먹는 술이라 그런지 맥주맛도 기가 막혔다.
우리는 그 다음날부터 일주일 이상 미국 전역을 돌며 HP(Hewlett Packard)사를 비롯한 고객들을 만나러 다녔다. 어딜 가나 16M D램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이제 나는 반도체라면 전세계 어딜 가나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가져간 16M D램이 미국 시장에 첫발을 들여놓은 시제품이라는 사실이었다.
‘삼성의 16M D램 샘플 최초 출하’는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회의시간에 졸던 그 IBM 구매담당자 자틴 메타 부장은 당시 삼성에 깊은 인상을 받고 몇 년 뒤 아예 삼성에 입사했다. 그 친구한테 내가 샘플을 주던 날 IBM 내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옆방에서 진행중이던 임원회의에 뛰어들어가서, 어느 회사에서 16M D램을 갖고 왔는데 어디인지 알아맞혀보라고 했단다. 물론, 당연히, 삼성이라고 답을 맞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회사가 삼성이라는 사실을 안 IBM 임원들은 경악했다. 제품을 돌려본 IBM 임원진은 삼성의 잠재력을 인정하며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IBM 내부에는 ‘앞으로 삼성에 크레디트를 많이 주고 조만간 절차를 거쳐서 1M와 4M D램을 구매할 것’이라는 메모가 회람되었다고 했다.
‘16M D램을 개발한 일류 반도체회사’라는 평가에 힘입어 타박받던 1M와 4M D램까지 덩달아 덕을 본 것이다. 우리는 기회를 놓칠세라 그토록 판매하기 어려웠던 IBM을 집중 공략했고, 동시에 일본 업체로 들어가는 주문의 상당 물량을 삼성으로 돌릴 수 있었다.
미국에 샘플을 배포하고 돌아온 7월 30일, 미국 실리콘밸리의 <일렉트로닉바이어스뉴스Electronic Buyers’ News>지는 삼성의 16M D램 샘플 배포에 관한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의 제목은 ‘삼성이 16M D램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다(Samsung Coup, 16M DRAM)’이었다. 그때까지 반도체업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삼성이 유수한 미국, 일본, 독일의 모든 회사에 앞서 당시 최첨단제품인 16M D램 샘플을 배포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기사였다.
나는 우리 보다 앞서 16M D램 개발을 선포한 일본이 왜 완전동작하는 16M D램의 샘플을 뿌리지 않는지 너무 궁금했다. 일본 회사가 세계적 반도체학회 ISSCC에서 16M D램 기술의 개발을 발표한 것은 이미 몇 년 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HP사를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당시 일본의 16M D램 기술은 논문을 발표하는 차원의 기술 개발 정도에 그쳤을 뿐 실제 우리처럼 완전동작하는 칩의 개발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랬구나!” 나는 무릎을 쳤다.
일본이 아직 16M D램을 개발하지 못했다는 것은 드디어 우리가 반도체기술에서 일본을 완전히 따라잡았다는 의미였다. 일본을 반도체로 집어삼키겠다던 나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희열과 전율은 감히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14. 삼성에서의 초고속 승진
1992년을 기준으로 세계 D램 시장에서 16M D램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회사는 삼성이 유일했다. 일종의 독점이었다. 세계 최첨단 분야에서 한국이 시장을 독점한 것은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기분이 참 묘했다. 사람들은 좋아서 싱글벙글하면서도 이게 꿈인가 생신가 하며 볼을 꼬집어보기도 했다. 국내외의 언론도 흥분해서 한때는 거의 매일 보도하다시피 했다.
93년에 들어서면서 다른 경쟁사들이 하나둘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삼성은 80%를 웃도는 독점적 시장점유율을 자랑했다. 이러한 시장독식 행진은 94년 말에야 주춤하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경쟁에서 밀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장 생산규모가 그 정도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없어서 못 파는 시절이었다. 아무리, 아무리 공급해도 주문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행복한 비명이 계속되었다.
손톱만한 16M D램 하나의 부가가치는 엄청난 것이었다. 92년 당시에는 16M D램 한 개를 500달러에 팔기도 했으니까. PC의 폭발적인 수요팽창에 따라 모든 D램이 품귀였지만, 당시 가장 기억용량이 높던 16M D램의 경우 무게 대비로는 금보다 훨씬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PC붐을 타고 신형컴퓨터가 속속 등장하여 메모리 수요는 폭증하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해프닝이었다.
당시 삼성의 경쟁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95년 삼성은 월 500만 개의 16M D램을 생산했다. 세계시장의 40%에 육박하는 물량이었다. 같은 기간에 20~30만 개를 생산한 일본이나 미국의 업체와는 비교를 거부했다. 95년 초까지는 4M D램이 세계시장의 주력이었다. 당시 4M D램이 개당 11달러였던 데 비해 16M D램은 90달러에 거래되었고, 그나마도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항공화물로 보낸 메모리가 박스째 도난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우리는 반도체업계의 상식에 따라 95년쯤 되면 판매가격이 5~6달러 정도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94년 말 미국인 마케팅 부사장 마크 엘스베리가 내년에는 가격이 5달러쯤 될 거라고 말한다는 것을, 실수로 내년에도 50달러쯤은 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웃으면서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했다. 그런데 정말로 95년 11월 말까지 내내 50달러 이상을 유지했다. 덕분에 삼성은 95년 한 해에만 1조 원이 넘는 엄청난 순이익을 달성할 수 있었다. 적절한 투자전략과 대량생산, 그리고 4M D램과 16M D램의 고부가가치에 힘입은 것이었다. 회사는 언제 만성적자였냐는 듯 전례없는 흑자를 연달아 기록했다.
나는 반도체개발 및 관련분야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87년부터 5년간 계약직 이사대우로 있다가 계약이 만료된 92년에는 상무로, 이듬해에는 바로 전무로 승진했다. 전무가 되면서 반도체 개발과 생산을 총괄하는 메모리사업부장을 맡았다. 부사장이 된 것은 약 1년 반 후인 95년이었고, 96년 말에는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발탁됐다. 거의 1년이나 1년 반 만에 한 번씩 승진을 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하는 일이 조금 익숙해지려고 하면 더 큰 조직이나 업무를 맡게 되어 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삼성이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동안 해외 경쟁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름도 모르던 경쟁자가 치고올라왔으니 선진업체들이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세계 정상의 명예는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막중한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동시에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로 시작되는「반도체십계명」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아침마다 복창하던 이 열 가지 신조는 선진업체들의 비웃음과 견제를, ‘반도체 때문에 삼성그룹은 침몰할 것’이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던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사실은 너무나 두려웠던 스스로의 마음을 극복하기 위해 악을 쓰고 외친 절규였다.
나는 생각했다. 지속적인 첨단 반도체기술 개발과 수출이 회사 차원을 떠나 이 나라의 젖줄이 되리라는 것을, 반도체가 원자폭탄 같은 위력을 지니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자 다시 ‘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는 신념과 자신감이 살아났다. ‘이 두 손으로 우리나라 반도체를 계속 일으켜 나아가리라.’ 땀에 젖은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잇달아 개가를 올렸다. 93년에는 권오현 박사가 64M D램을, 95년에는 황창규 박사(현재 반도체총괄 사장)가 256M D램을, 97년에는 박종우 박사(현재 프린터사업담당 사장)가 1G D램을 각각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D램 이외의 각종 메모리사업에서도 대박이 났다. 임형규 박사(현재 종합기술원 사장)가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MP3나 디지털카메라에 사용되는 낸드플래시메모리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삼성은 93년 반도체메모리 분야에서 매출 1위에 등극한 이후 단 한 번도 1등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꼴찌로 엄청난 적자를 내면서 출발한 지 10년 만에 기라성같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선두를 차지한 후 죽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94년 반도체 한 품목만으로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고, 10년이 흐른 지금은 반도체부문에서 250억 달러 이상을 수출하고 있다. 반도체산업은 이제 우리나라의 먹거리산업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메모리반도체가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한국을 대표하는 주력 수출품목이 된 것이다. 이 정도면 ‘반도체신화’라고 감히 말해도 되지 않겠는가?
15. 카우보이모자를 쓴 사장
반도체메모리 사업이 이미 수년째 세계 1위의 자리를 공고히 잡았으며, 그 후 내가 담당했던 비메모리 시스템 사업도 자리를 잡으면서 나는 다른 사업을 일궈보고 싶었다.
‘성공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나의 인생철학이 새로운 도전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21세기의 화두는 분명 디지털기술에 있다고 확신하고 99년 말 디지털TV와 컴퓨터 및 관련기기들을 만들어 사업하는 정보가전본부장으로 옮겨가기를 희망했다. 그때까지 나는 주로 반도체에만 관여했지 시스템이나 세트 사업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본사에서는 좀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나 99년 말 인사이동에서 나는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되는 동시에 정보가전사업총괄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당시 정보가전사업총괄은 다른 사업부에 비해 이익을 잘 내지 못해 회사에서 골치거리로 여기던 사업부였고 직원들 역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우선 직원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정보가전’이라는 구식명칭을 21세기에 맞는 ‘디지털미디어총괄’로 갈아치우고 2000년 1월에 출범식 행사를 가졌다.
나는 성격상 남 앞에 나서서 튀는 행동 하는 걸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 출범식에서는 뭔가 색다른 방식으로 관심을 모으고 나의 의중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척자정신을 상징하는 카우보이모자에 콤비양복을 입고, 1천여 명의 직원들로 꽉 찬 강당에 들어섰다.
의례적이고 뻣뻣한 출범식을 예상했던 직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직접 파워포인트로 작성한 ‘디지털미디어총괄의 비전’을 설명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직원들의 의견도 직접 물어보고 좋은 건의를 한 직원에게는 즉석에서 작은 선물도 주었다.
출범식이 끝나자마자 나는 6개나 되는 사업부를 횡적으로 묶어 6개 사업부장이 다함께 모이는 회의체를 만들었다. 공동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공통의 기술적인 문제를 연결해 주는 연구소도 새로 설립했다. 그러자 하나의 사업총괄이라는 소속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같이 모여서 서로간의 공동관심사를 논의하는 기회도 많아졌다.
PC에 프린터를 묶어 판매하고 이익은 나중에 나누자는 식의 얘기도 자연스럽게 오갔고, 따로 하던 구매도 가격을 비교해 공동구매로 돌렸다. 게다가 물류나 공장시설도 공유하니 상당한 실익을 도모할 수 있었다.
디지털미디어사업총괄은 국내 사원 7천여 명에 해외 현지고용인 7천여 명을 거느린 거대한 사업부였다. 무엇보다 전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한 가전제품 분야였다.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원한 새로운 도전이었고 21세기에 밀어닥칠 디지털혁명을 앞장서서 진두지휘한다는 것은 정말 스릴만점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내게 다시 신나게 일해볼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16. 소니를 잡아라
지금은 휴대폰이나 디지털TV 등 세계적인 제품을 상당히 많이 보유한 삼성전자지만, 1999년까지만 해도 이렇다 하게 내세울 만한 제품이 많지 않았고 제품모델(Line-up)도 미흡했으며 그나마 중저가 위주였다. 미국에 수출하는 TV의 예를 들면, 소니는 30여 모델이 있고 3천 달러 이상의 고가품도 있는 데 비해, 삼성은 10여 모델에 1천 달러 이하의 제품들만 팔고 있었다.
이러한 시장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역량을 총동원하여 확실하게 차별되는 제품을 만드는 것.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성능이 우수하고 디자인도 탁월한 제품을 만들어 소니의 아성에 도전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우선 컴퓨터분야부터 시작했다. 당시 얇고 가벼우면서 멀티미디어 기능이 보강된 소니의 VAIO노트북이 미국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는 소니보다 더 얇고 가벼운 노트북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연 소니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을까?’ ‘설사 만든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팔 수 있을까?’ 등 자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두께 20mm 이하, 무게 3파운드(약 1.35kg) 이하의 노트북 생산’을 목표로 내걸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물론 VAIO를 능가하는 사양이었다. 내가 여러 가지 제품군 중에서도 노트북을 시발점으로 삼은 데는 개인적인 경험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반도체부문에 근무하던 시절 나는 해외출장을 자주 다녔는데, 그때마다 소니의 VAIO를 가지고 다녔다. 화면이 10인치밖에 안 되지만 들고 다니기에 가볍고 간편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 같은 데 출장을 가서 강연이라도 할라치면 소니 노트북을 사용한다는 것이 좀 창피하고 민망했다. 그때마다 우리도 좋은 노트북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더구나 이제 PC사업부를 관장하는 입장인데, 계속 경쟁사의 제품을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컴퓨터사업부장을 불렀다.
“내가 계속 소니 VAIO를 들고 다니게 할 거요? 아니면 더 나은 것을 만들어줄 거요?
나같이 출장이 잦은 CEO급이 갖고 싶어할 고급노트북을 만들어보시오.”
소니를 능가하며 세계시장에서 각광받을 고급노트북을 개발한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당시 막 가전제품의 외곽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마그네슘강판을 사용하기로 했다. 마그네슘강판은 가볍고 튼튼하며 은은한 은빛으로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내는 데 적격이었다. 하지만 이를 만들어 공급하는 국내 중소기업 기술력의 한계 때문에, 제품에 적용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강판이 휘기도 하고 잘 깨지는 등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국산 토종기술을 고집, 마침내 완성해 냈다.
우리는 노트북의 두께를 줄이기 위해 당시 갓 나온 최신소재 박막 LCD패널을 과감하게 채택했다. 얇으면서도 손가락에 닿는 터치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키보드도 만들어보았다. 연한 것에서 딱딱한 것까지 수종을 늘어놓고 눈을 감은 채 직접 타자를 쳐보면서 제대로 된 느낌이 들 때까지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얇은 노트북PC를 만드는 데 가장 어려운 문제는 CPU에서 나오는 열을 어떻게 잘 식히는가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CPU에서는 열이 많이 나기 때문에 동작중에 건드리면 손을 델 정도인데, 그 위에 작은 팬이 있어 바람으로 열을 식혀주게 된다. 그러나 워낙 얇게 하다 보니 그 팬을 CPU 위에 올려놓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PC의 한쪽 가장자리에 대형팬을 설치하고 열역학적인 연구를 거듭해 열을 식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팬의 크기가 커지면서 소리도 커져 시끄럽다는 단점이 발생했다. 다시 조용한 밤에도 팬이 도는 소리를 못 느낄 정도로 소음이 적도록 설계를 변경했다.
디자인도 검은색이나 기껏해야 회색의 우중충한 외관 대신 최신 비디오기기처럼 세련된 모양과 색상을 채택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소니보다 더 얇고 가벼우며 디자인 면에서도 훨씬 세련된 노트북 개발에 성공했다. 우리는 이 노트북을 ‘센스Q’라고 명명했다. 센스는 ‘Samsung Electronics Notebook System’의 약어다.
남은 문제는 마케팅을 잘해서 손익분기점 이상은 물론, 목표로 하는 일품 3억 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런데 센스Q가 국내에 출시되면서 이런 걱정은 불식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센스Q를 시장에 내놓은 것은, 소니가 국내에 VAIO를 출시하려고 했던 2000년 12월보다 한 달 앞선 2000년 11월이었다. 당시 주로 팔리던 노트북PC는 화면 크기 12인치에 가격은 200만 원대였다. 센스Q는 화면 크기가 10인치밖에 안 되었지만, 우리는 가격을 300만 원대로 책정했다. 센스Q는 출장 등 특수한 목적으로 가격을 불문하고 노트북을 구입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매수량이 아주 많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당시 기준으로 상식을 뛰어넘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해나갔다. 국내 반응은 매우 좋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업 CEO뿐만 아니라 대학생들에게도 많이 팔렸는데, 여유있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사주는 경우였다. 우리는 한 달에만 수천 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에 당황한 소니는 결국 VAIO의 한국 출시를 미뤄, 약 1년 뒤에나 신모델로 일부 출시했으나 센스Q와는 아예 경쟁이 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도 센스Q의 후속모델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해외출장길에 센스Q를 가지고 다니면 외국인들이 ‘와우!’ 하면서 들여다본다. 정말 가슴 뿌듯한 일이다.
2002년 1월,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으로 있던 나는 앞으로 3년 내에 소니를 추격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그리고 삼성의 브랜드파워는 2005년에 세계 100대 기업 중 20위를 차지함으로써 21위의 소니를 앞섰다.
17. 10년 뒤 한국이 먹고살 거리를 만들어보시오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내각이 구성되면서 정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명단에 내 이름 석 자가 오르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후보자명단의 맨 꼴찌를 차지하고 있더니, 그 순위가 점점 올라가서는 급기야 두 명 중 한 명이라는 얘기가 세간에 떠돌았다. 그러나 정작 누구 하나 공식적으로 내게 연락해 준 사람은 없었다.
장관이 된다는 것은 솔직히 나에게는 전혀 현실성 없는 얘기였다. 공직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몸담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지금 누리고 있고 앞으로도 누릴 것이 확실시되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으로서의 연봉 수십억 원, 세계 전자업계의 초일류라는 전도양양함, 전세계를 누비며 국제적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흥미진진한 삶 등 그 모두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다는 것 또한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각 발표 바로 전날 밤, 몇몇 일간지 기자가 어떻게 집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뭐, 들은 얘기 없습니까? 오늘쯤은 정식으로 입각제의가 있어야 하는데…….
정통부 장관 하마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글쎄요, 저는 전혀 들은 바가 없어요. 아마 제가 아닐 겁니다.
오히려 뭐 아는 게 있으면 얘기 좀 해주시지요.”
사실이 그랬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나에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얘기해 주지 않은 것이다. 2003년 2월 27일, 그 운명의 날. 뭔가 찜찜한 채로 출근을 했는데, 오전 11시경 비서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나 또한 깜짝 놀라 잠시 숨을 고르고 수화기를 들었다.
“예, 전화 바꿨습니다. 진대제입니다.”
“여기는 청와대인데요. 2~3분 있다가 대통령께서 전화를 하실 겁니다.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뜻밖인지라 말문이 턱 막혔다. 심장이 갑자기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전화벨이 울렸다.
“아, 진대제 사장이십니까?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여러 사람이 진대제 사장이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가장 적임이라고 추천합디다.
앞으로 10년, 15년 뒤에 우리나라 국민이 먹고살 거리를 정부에 와서 만들어보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수초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몇 년 전부터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삼성전자가 10년, 15년 뒤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할지 마스터플랜을 만들어보라는 지시를 받아 여러 가지 고민과 연구를 하고 있던 터라 대통령의 이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발전한 삼성전자지만 세계적인 기업들과의 끝없는 경쟁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확실한 경쟁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분야를 미리 확보하여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라.’ 이런 의미로 내게 맡겨진 임무와 방금 대통령이 하신 이야기는 사실상 같은 맥락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일개 기업이 아니라 우리 국민 전부가 10~15년 후의 미래를 의존할 수 있는 그런 산업을 육성해 보라는 말씀이었다.
만약 그때 대통령이 “장관자리가 대단하니 한번 해보면 어떠냐?”라고 하셨다면, 나는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과 능력을 다해서 이 나라를 위해 한번 봉사해 보면 어떻겠는가?”라는 말씀은 어떤 이유로도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나라에서 지급한 장학금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오늘날의 내가 만들어진 것도 내 조국 ‘한국’이라는 배경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었던 일이기에, ‘아, 이런 것이 운명인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그런 임무가 주어졌을 때 “아니오”라는 대답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성공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내 인생의 좌우명도 고개를 들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해주시길 바라고요.
오늘 3시에 임명장 수여식이 있으니 청와대로 오시기 바랍니다.”
그 운명의 날 오후 3시에 나는 청와대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내게 말 못할 고민이 하나 있었다. 나는 2001년 3월 5일경 회사로부터 받은 7만 주의 삼성전자 스톡옵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만 더 근무하면 그 주식은 온전히 내 소유가 되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보통신부 장관 임명장을 받는다는 것은 동시에 삼성전자에 사직서를 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필 딱 일주일 차이로 그 엄청난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 주식은 옵션가격이 19만 원이었고 당시 삼성전자의 주가가 29만 원 정도였으니 당시 가치로 70억 원이었고, 70만 원이 넘는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300억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 청와대 인사수석이나 비서실장과 논의를 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또 왠지 공직자가 될 사람은 돈에 연연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오후 5시, 나는 광화문에 있는 정보통신부에서 누가 작성했는지도 모르는 취임사를 낭독함으로써 공직자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나는 취임사까지 낭독한 마당에 스톡옵션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자자손손 먹고살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그 돈은 내 것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졸지에 공직사회에 차출된 내게 변화는 의외로 빨리 찾아들었다. ‘고관대작’이라더니, 처우는 오히려 나빠졌다. 회사에서 타고 다니던 에쿠스450은 다이너스티250으로 내려갔고, 사무실 규모도 반이나 줄었다. 매년 회사에서 제공하던 건강검진도 없어졌다. 뭐니뭐니해도 장관 급여라고는 하지만 모든 수당을 다 합쳐도 회사 월급의 보름치도 안 되는 ‘쥐꼬리만한(?)’ 연봉이 가장 큰 변화였다. 그래도 매달 받는 급여는 ‘국민이 주는 녹’이라는 생각에 더 귀하게 여겨졌다.
내가 늘 반농담으로 말하는 이른바 ‘공익요원’으로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8. 정통부 때문에 못살겠다
공직에 와서 내가 제일 먼저 손댄 혁신 중 하나는 업무보고 형식이었다. 당시에는 정통부를 비롯한 모든 부처가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보고서양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 올라온 보고서를 읽어봤다. 소설 쓰듯이 온갖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 길게 써내려간 보고서는 술술 잘 읽혔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잘되었고 신중히 검토한다는 둥 말은 참 잘 써놨는데, 문제는 읽고 나서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고서 작성자를 불러 이게 무슨 소리냐고 직접 물어봤다. 황당하게도 본인 또한 잘 모르고 있었다. 텍스트문서라는 것이 내용을 잘 몰라도 그럴싸하게 서술식으로 수사를 달아 만들어놓으면 근사하게는 보이는 법. 그러니 ‘니도 잘 모르고 내도 잘 모르는’ 보고서가 올라오고, 양쪽에서 다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채 넘어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나중에 정책을 집행할 때 문제가 발생해도 책임소재가 불분명할 것이 뻔했다. 시급한 변화가 필요했다.
나는 즉시 정통부의 보고서양식을 워드프로세서에서 파워포인트로 교체했다. 그것은 단순한 프로그램의 변화가 아닌, 보고 자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술식 문서로 2~3페이지에 해당하는 내용을 간단한 핵심문장 몇 개로 된 파워포인트 한 장(슬라이드)에 담아내려면, 반드시 내용을 근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내용을 함축하는 키워드를 뽑아내는 것 자체가 내용의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통부는 이제 파워포인트로 간다”라고 선언하자 공무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소수의 젊은 층을 빼고는 대부분의 공무원이 파워포인트를 써본 적도 없고 쓸 줄도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한술 더 떠 한 달여 남은 대통령 업무보고를 파워포인트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한 달 사이 기초부터 시작해 대통령께 보고할 문서까지 만들어야 하니, 국장과 과장들이 ‘뺑뺑이’깨나 돌았다. 부처 내에 원성이 자자했다. 지금은 파워포인트를 수준급으로 다루는 우리 직원들이지만 ‘정말 죽을 맛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 뒤에서 원망도 많이 했단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대통령 보고용 파워포인트가 올라왔다. 하지만 파워포인트로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파워포인트에 집어넣은 에센스(정수)와 세부사항을 직원들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가’였다. 나는 파워포인트 자료를 화면에 띄워놓고 직원들에게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굵직한 사항부터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일일이 물어대니 직원들이 쩔쩔맸다.
“2003년까지 인터넷 기반시설(Infrastructure)을 까는 데 예산이 얼마나 들었소?”
“예…… 그게 아마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러고는 잠시 알아보고 온다며 나가더니 한참만에 헐레벌떡 계산을 해가지고 돌아왔다. 23조 원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23조 원씩이나 투자를 했으면 ROI(Return Of Investment, 투자수익)는 얼맙니까?”
“예? ROI……? 투자효과 말씀이십니까?”
그게 뭐냐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정부에는 ROI, 즉 투자의 결과로 발생하는 수익이나 혜택에 대한 자료가 없었다. 아니 아예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어떤어떤 일을 하는 데 500억 원의 예산을 썼다고 하면서도, “그걸로 어떤 효과가 있었느냐?”라고 물으면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회사라면 당장 모가지가 날아갈 일이었다. 기업에만 몸담아온 나로서는 황당한 노릇이었다. 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시 국고에 쌓일 예산이니 효과는 어떻든 써버리면 그만이라는 방식은 고칠 필요가 있었다. 피같은 국민의 세금이 아니던가.
2003년 3월, 청와대에 들어가 노무현 대통령께 정책보고를 했다. 모든 부처가 차례로 준비해 온 자료를 발표했는데, 파워포인트로 보고자료를 준비한 곳은 우리뿐이었다.
정통부의 발표순서는 네 번째. 대통령과 외부전문가들에게 준비해 간 자료를 보고하고 나서 질의시간을 갖는 방식이었다. 앞에 발표한 부처를 보니 보고 자체에도 적잖은 시간이 걸리고, 질문을 받으면 답을 찾아헤매느라 배당된 시간 안에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텍스트문서를 사용하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우리 차례가 되어, 30여 장 정도로 간결하게 준비한 파워포인트문서를 투영했다. 간략하게 핵심만 요약해 짚고 넘어가니 시간이 오래 걸릴 이유가 없었다. 대통령이 아주 흐뭇한 얼굴로 경청하셨다.
“보고내용에 대한 질문을 받겠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외부전문가와 청와대 보좌진에서 질문을 하는 중에 벌써 답변이 제시된 백업 슬라이드가 떴다. 모든 질문에 대비해 메인슬라이드의 핵심내용과 관련한 세부사항을 약 100여 장의 슬라이드에 담아 따로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출제’가 예상되는 질문을 미리 만들고 그에 대한 모범답안을 이 백업 슬라이드에 담아두었으니 답변은 훨씬 수월했다.
길게 말로 풀어서 설명할 필요 없이 보충설명과 그림, 그래프가 깨끗하게 나열된 슬라이드를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신속하게 나갔고, 많은 경우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파워포인트에 답이 떴다. 질문의 상당수가 우리가 미리 준비한 출제 예상문제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어떤 질문을 해도 모범답안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질문을 하던 대통령이 “어? 답이 벌써 나와 있네!”라며 놀라워했다.
이렇게 하니 질문과 답변의 사이클이 매우 빨랐다. 다른 부처의 경우 보통 10개 정도의 질문을 하면 끝나는데 우리는 수십 개의 질문을 받는 식이었다. 대통령은 정통부의 정책에 상당한 신뢰를 보여주셨다. 외부전문가들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2005년. 세 번째 대통령 업무보고를 하다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다른 부처도 모두 보고형식을 하나같이 파워포인트로 바꾼 것이다. 단시간 내에 파워포인트로 바꾸려다 보니 무지 고생을 했고, 파워포인트 발표자료를 외주로 처리하느라 돈도 수천만 원 깨졌다는 후담이 흘러나왔다.
우리 정통부는 작년이나 재작년과는 또 다르게 파워포인트 형식을 바꿔 발표했다. 기존의 것을 업그레이드한 버전이었다. 그러자 다른 부처에서 또 난리가 났다. 파워포인트로 교체를 했는데도 다시 정통부 것과 차이가 났으니 말이다. 어느 부처의 사무관이 정통부의 동료 사무관에게 “야, 고마(그만) 해라. 정통부 때문에 죽겠다”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정보통신부의 대통령 정책보고 장면. 미리 예상문제와 답을 준비해 질문이 나오면 바로 답이 뜨도록 했다.
19. 진 장관이 기획예산처장관 하세요
나는 정통부에 들어온 이후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파워포인트와 MBO, CEO미션제 등 기업경영을 정부정책에 꽤 많이 접목했다. 내가 이렇게 여러 가지 정부혁신을 시도하자 정보통신부 내부는 물론 다른 정부부처에서도 “정통부 때문에 못살겠다”는 앓는소리가 들려왔다. 대통령이 정통부의 혁신을 접할 때마다 “다른 정부기관들도 정통부만큼 해보시오”라고 주문하는 바람에 상당한 중압감으로 작용한 모양이다.
그런데 본의아니게 다른 부처를 괴롭힌 사건이 또 있었다. 그것도 민감하기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예산’ 문제로. 처음에 정통부 예산을 들여다보니 항목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 항목들이 다 비슷비슷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기획예산처에 가서 예산을 많이 받아내기 위한 일종의 ‘꼼수’였다. 어차피 기획예산처에서는 유사한 항목을 구분하기 어려울 테니 고의로 세분화시켜 그 수를 늘리는 방법을 사용해 온 것이다. 그러나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나는 항목을 줄이기로 했다. 그러면 자연히 소요되는 국가예산이 줄어들 것이었다. 나는 당장 내년 예산계획서를 퇴짜놓았다. 정통부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인 ‘IT839’의 3에 해당하는 광대역통합망 예산보고도 세 번이나 돌려보냈다. 광대역통합망을 담당하는 과장은 이게 핵심 중의 핵심사업인지라 자기는 절대로 예산이 안 깎일 거라고 자신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마저 이러니 다른 항목들은 모두 설설 길 수밖에 없었다.
정통부 예산을 관리하는 노준영 기획관리실장에게 2005년 예산의 항목을 정확하게 10% 줄이라는 CEO미션을 부여했다. 그러자 그는 한술 더 떠 항목을 15%나 줄이는 데 성공했다. 자연히 예산도 6%나 감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중에 알아보니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로 부처에서 자체적으로 예산을 줄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04년 6월 어느 토요일, 대통령이 국무위원들을 다 불러놓고 예산회의를 주재하셨다.
“주어진 전체 예산을 서로들 많이 가져가려고 하겠지요? 주말에 2박 3일 정도는 회의를 해야 뭔가 해결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시간도 별로 없고 하니 오늘 하루종일 토론을 해서 결론을 만들어보도록 하지요.”
먼저 기획예산처가 보고를 하고 이어서 각 부처별로 소견을 얘기하는 순서가 되었다. 예산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보건복지부·국방부·교육부 장관이 먼저 이런저런 이유로 예산이 더 많이 필요하긴 하지만, 올해 예산보다 물가상승률 정도만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몇몇 장관은 연속사업은 괜찮으나 신규사업이 늘어나 상당한 예산이 더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기획예산처 장관으로부터 사전에 보고를 받아 정통부는 예산을 오히려 삭감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다. 비밀에 부친 일이었지만, 이 사실을 전해들은 기획예산처나 일부 청와대 인사들도 믿기지 않는 일이라고 평했다.
나는 그때까지 일부러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다른 부처에서 서로 예산을 더 타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우린 줄였다고 얘기하면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깐 휴식시간이 있고 회의가 재개되었을 때 대통령이 운을 떼셨다.
“다른 사람들은 예산 짤 때 있었던 얘기 좀 안 합니까?
휴식시간도 끝났는데 좀 다른 얘기들은 없나요?”
눈치를 보니까 나더러 이제 슬슬 발표를 시작하라는 일종의 사인 같았다. 얼마 후 정통부 차례가 되었다.
“저희는 자발적으로 예산을 줄였습니다. 항목을 15% 정도 줄였고
전체 예산도 약 6% 정도 감소시킬 수 있었지만,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일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도록 했습니다.”
다들 깜짝 놀랐다. 기획예산처 장관이 예산을 어떻게 줄일 수 있었는지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유사항목을 줄이고 불필요한 예산을 삭감했다고 하자 기획예산처 장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정통부 장관이 기획예산처 장관 하세요.”
엄숙한 회의장에 웃음이 번져나갔다.
이어서 몇 장관이 더 발표를 했지만 누구도 예산을 더 달라고 주장하기가 어려워졌다. 원래 회의가 오후 5시까지 예정되어 있었는데, 정오쯤 되니까 거의 모든 회의가 끝나 있었다. 대통령이 말씀하셨다.
“분위기를 보니 예산이 거의 판가름난 것 같습니다.
할 얘기도 다들 한 것 같으니 점심이나 먹고 집에 가도 되겠네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토요일이라 다들 좋아했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나와보니 문제가 생겨 있었다. 운전기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회의가 적어도 5시는 돼야 끝날 걸로 알고 기사들이 다같이 등산을 가거나 개인적인 일을 보러 가버린 것이다.
토요일이라 길도 막히고 해서 기사들이 돌아오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다들 점심을 먹고 약 한 시간씩은 기다린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 나에 대한 세 가지 오해
나를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나의 지나온 이력이나 언론에 소개된 기사를 보고 흔히 갖게 되는 선입견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오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진대제는 아주 차갑고 냉정한 사람일 것이다.
둘째, 진대제는 부잣집 아들일 것이다.
셋째, 진대제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내 성격이 차갑고 냉정할 것 같다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이유를 물어보면,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일을 할 때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무섭게 몰아붙인다고 하니 당연히 그렇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하긴 업무에 관해서는 목표를 설정하거나 실천하는 데 양보가 없고,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야단을 치니 그런 얘기를 들을 만한 것도 같다.
그러나 나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뜻밖이다, 의외로 소탈하고 부담없는 성격이다”라고 입을 모은다. 사석에서 부하직원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고 가족들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정답게 통화하는 모습도 아주 뜻밖이란다.
나는 천성적으로 권위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사람들과 처음부터 쉽게 어울려 웃고 떠들고 하는 성격은 못 되는데, 이는 아마도 젊은시절에 10년이나 외국생활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부잣집 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오해다. 공직자 재산공개에서 참여정부 각료들 가운데 수위를 차지하면서 형성된 ‘돈 많은 장관’ 이미지 때문에, 이런 오해가 광범위하게 퍼진 게 아닐까 싶다. 또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갔을 때 진행자가 나의 학력과 이력을 보고는, “유복한 가정에서 어려움 없이 공부한 모범생일 것”이라는 멘트를 했는데 이것도 이 오해의 한 근원지가 된 것 같다.
재산은 회사에서 받은 연봉이나 보너스, 퇴직금 등을 잘 모은 것이다. 다만 회사가 글로벌 경쟁을 하고 수익도 많이 났으니 사장급 연봉을 선진국 초일류기업의 CEO 수준으로 준 덕분에 제법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잣집 아들은커녕 초등학교 때부터 오직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학교를 다녔으니, 오해도 무지막지한 오해다. 어릴 때 가난을 뼈저리게 느껴봤으니 근검절약이 생활화되어 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과 아이들에게 “짜다”는 소리를 꽤 많이 듣는 편이다. 그런데 왜 그런 선입견이 생겼을까? 어떤 사람은 내 얼굴을 보면 가난에 찌든 티가 나지 않아서 어린시절에 그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듣기는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또 하나의 엉뚱한 오해가 있는데, 바로 “진대제는 군대를 안 갔을 것 같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서른 중반까지 거의 10년 가까이 살면서, 박사학위 따고 수많은 특허를 내고 IBM 등의 기업에서 근무하면서 어느 짬에 군대를 다녀왔겠냐는 말이다. 게다가 부잣집 출신인 것 같으니 소위 ‘빽’으로 군대를 면제받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정말 억울한 일이다. 해군에 자원입대한 나는 당시 군기 세기로 소문났던 고사포부대에 배치되었다. 기합이 빳빳하게 들어서는 그 추운 겨울에도 고사포와 탄약고를 지켰고 취침시에는 해병대 내무반에서 야간점호도 하는 등 시쳇말로 ‘뺑이’도 돌았다.
하루는 한 동료의 실수로 우리 부대 전체가 분뇨가 뿌려진 배추밭을 ‘낮은 포복’ 하는 기합을 종일 받았다. 그날 군복에 냄새가 배어 나중에 빨아 입었는데도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코를 막고 도망을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예비군훈련에도 빠지지 않았는데 총을 잘 쏴서 일찍 귀가하곤 했다.
6·25 직후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나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냈고, 군대도 다녀왔다. 그리고 또 알고 보면 커피 한잔 같이 하고 싶은 따뜻한 남자다.